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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MOOC 공부/우리 시대 한국의 시인들

8주차 - 나희덕의 시 : 존재의 실상인 어둠

by 2000vud 2017. 11.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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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약처럼 비는 내리고

나희덕


뿌리뽑힌 줄도 모르고 나는 
몇줌 흙을 아직 움켜쥐고 있었구나 
자꾸만 목이 말라와 
화사한 꽃까지 한무더기 피웠구나 
그것이 스스로를 위한 조화(弔花)인 줄도 모르고 

오늘밤 무슨 몰약처럼 밤비가 내려 
시들어가는 몸을 씻어내리니 
달게 와닿는 빗방울마다 
너무 많은 소리들이 숨쉬고 있다 

내 눈에서 흘러내린 붉은 진물이 
낮은 흙 속에 스며들었으니 
한 삼일은 눈을 뜨고 있을 수 있겠다 

저기 웅크린 채 비를 맞는 까치는 
무거워지는 날개만큼 말이 없는데 
그가 다시 가벼워진 깃을 털고 날아갈 무렵이면 
나도 꾸벅거리며 밤길을 걸어갈 수 있겠다 

고맙다, 비야. ‥‥‥고맙다. ‥‥‥ 고맙다. ‥‥‥ 


서정시의 특징을 갖고 있는 시네요.
뿌리가 뽑혔다는 것은 죽음을 의미하는 것 같아요.
그렇지만 몸에 있는 모든 것을 쏟아 꽃을 피웁니다.
조화는 죽은 사람에게 드리는 꽃이지요.
화자는 죽음을 암시하고 아마 자신에게 조화를 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깨끗하게 죽음을 맞이하고 싶어합니다.
내리는 비로 몸을 씻고,
꾸벅꾸벅 힘든 몸을 끌고 밤길을 걸어가기 때문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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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오동의 상부

나희덕

나는 어제의 풍경을 꺼내 다시 씹기 시작한다 
6층에서 바라보는 풍경은 그리 높지도 낮지도 않아서 
앞비탈에 자라는 벽오동을 잘 볼 수 있다 
며칠 전만 해도 오동꽃 사이로 벌들이 들락거리더니 
벽오동의 풍경은 이미 단물이 많이 빠졌다 
꽃이 나무를 버린 것인지 나무가 
꽃을 버린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그래도 꽃을 잃고 난 직후의 벽오동의 표정을 
이렇게 지켜보는 것도 또 다른 발견이다 
꽃이 마악 떨어져 나간 자리에는 
일곱 살 계집애의 젖멍울 같은 열매가 맺히기 시작했는데 
나는 그 풍경을 매일 꼭꼭 씹어서 키우고 있다 

누구도 꽃을 잃고 완고해지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을 
6층에 와서 벽오동의 상부(上部)를 보며 배운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거칠고 딱딱한 열매도 
저토록 환하고 부드러운 금빛에서 시작된다는 사실이다 
이미 씨방이 닫혀버린 벽오동 열매 사이로 
말벌 몇 마리가 찾아들곤 하는 것도 
그 금빛에 이끌려서일 것이다 
그러나 저 눈 어두운 말벌들은 모르리라 
캄캄한 씨방 속에 갇힌 꿈들이 어떻게 단단해지는가를 
내 어금니에 물린 검은 씨가 어떻게 완고해지는가를

시는 아마도 벽오동에 올라갔나봅니다.
벽오동은 나무의 종류입니다.
벽오동의 꽃을 보면 여러갈래로 나뉘어져있습니다.
마치 인간의 신경을 연결해 놓은 것같은 모습을 보이죠. ^^
꽃은 언젠가 시들어 사라집니다.
그 자리는 열매가 되죠.
말벌들이 와서 열매의 당분을 가져가고 싶어요. 열매는 단단하여,
결코 넘볼 수 없는 상대가 되었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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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은 왜 등뒤에서 불어오는가

나희덕

바람을 향해 고개를 돌리는 순간 
눈이 멀 것만 같아 
몸을 더 낮게 웅크리고 엎드려 있었다. 
떠내려가기 직전의 나무 뿌리처럼 
모래 한 알을 붙잡고 
오직 바람이 지나가기만 기다렸다. 
그럴수록 바람은 더 세차게 등을 떠밀었다. 

너를 날려버릴 거야 
너를 날려버릴 거야 
저 금 밖으로, 흙 밖으로 

바람은 왜 등 뒤에서 불어오는가 
수천의 입과 수천의 눈과 수천의 팔을 가진 바람은 

나는 엉금엉금 기어서 
누군가의 마른 종아리를 간신히 붙잡았다. 
그 순간 눈을 떴다 

내가 잡은 것은 뗏목이었다. 
아니, 내가 흘러내리는 뗏목이었다.

바람은 고마운 존재입니다.
하지만 감당할 수 없는 바람은 피해를 입히기도 합니다.
바람은 자신의 할일을 묵묵히 합니다.
어쩌면 타인을 욕하기 전에 그가 왜 그렇게 했는지 한번 다시 생각해볼 필요가 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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